EU, 2028년부터 본격 시행…섬산련, 국내 첫 가이드라인 발간
2024년 7월 EU는 지속가능한 제품을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ESPR)을 공식 발효했다. 섬유·의류는 배터리·전자제품과 함께 최우선 적용 품목으로 지정됐고, 2028년부터는 디지털 제품여권(DPP) 부착이 사실상 의무화된다.
제품의 설계·생산·유통·폐기 전 과정을 디지털로 추적하고 공개하도록 강제하는 이 규제는 섬유패션 산업의 공급망 구조와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뒤흔드는 패러다임 전환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섬유산업연합회가 2025년 12월 발간한 섬유패션 DPP 도입 가이드라인은 그 대응의 출발점이다.
DPP란 무엇인가 ‘제품의 디지털 신분증’
디지털 제품여권은 원자재 조달부터 생산·유통·소비·재활용에 이르는 제품 전 생애주기 정보를 디지털 형태로 담아 QR코드, NFC 태그 등 데이터 캐리어를 통해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다. 소재 구성, 재활용 원료 함량, 탄소 발자국, 유해물질 포함 여부, 수선 가이드 등이 모두 포함된다.
EU는 이를 통해 ‘폐기물 없는 시장(Zero Waste Market)’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섬유·의류는 배터리, 전자제품과 함께 ESPR 최우선 적용 품목으로 지정됐다. 패스트패션으로 인한 자원 낭비, 미세플라스틱 배출, 대규모 의류 폐기 문제가 환경 영향 1위로 꼽혔기 때문이다.

섬유 산업 관리시스템 데이터와 섬유 DPP 데이터 통합(출처: A Global DPP Frame Sustainable Value Chains, Gerhard Heeskerk, 2025. 6. 30)
2026년 한 해가 사실상 첫 시험대
업계가 주목해야 할 가장 가까운 데드라인은 2026년 7월 19일이다. 이 날부터 대기업은 미판매 의류·신발의 소각·매립이 전면 금지된다. 연간 폐기 수량, 중량, 사유를 웹사이트에 공개해야 하며, 예방 조치 계획도 제출 의무가 생긴다.
2027년에는 섬유·의류에 대한 구체적인 에코디자인 위임입법이 확정될 예정이다. 내구성, 재활용성, 재활용 원료 함량 의무화, DPP 부착 의무화가 담긴다. 중견기업은 2030년, 소·초소형 기업은 적용 제외이지만, EU 수출 기업은 규모와 무관하게 당장의 준비가 필요하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유니클로(UNIQLO)는 에이버리데니슨(Avery Dennison)과 협력해 전 제품에 RFID 태그를 부착, 생산부터 판매까지 개별 단위 추적 체계를 구축했다. 재고 정확도 99%를 달성했고 이 인프라는 향후 DPP의 핵심 데이터 수집 기반이 된다.
LVMH 그룹은 2026년까지 모든 신제품에 DPP 기능을 적용하겠다고 선언했다. 프라다, 리치몬트와 공동으로 ‘아우라 블록체인 컨소시엄’을 설립해 위조 방지와 소유권 이력 관리를 동시에 해결했다. 로로피아나는 캐시미어 원료 조달 이력을 QR 스캔으로 소비자에게 공개하고, 리모와는 제품 이력·보증 정보를 DPP로 제공한다.
일본 소재기업 테이진(Teijin)은 네덜란드 추적성 전문기업 서큘러라이즈(Circularise)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다. ‘스마트 퀘스처닝(Smart Questioning)’ 기술로 염색 레시피 등 영업비밀은 보호하면서도 재활용 소재 함유량 등 친환경성 지표를 외부에 증명할 수 있게 됐다. 아라미드·탄소섬유 등 고기능성 소재의 전 과정 추적성 확보에 활용 중이다.
데이터 표준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다
DPP를 처음부터 새로 구축할 필요는 없다. 글로벌 가이드라인은 DPP에 필요한 데이터의 70~80%가 이미 기업이 활용 중인 플랫폼에 존재한다고 명시한다. 글로벌 동향도 ‘새로운 데이터 구축’ 경쟁에서 ‘API를 통한 기존 데이터 연동’ 경쟁으로 전환됐다.
환경 성과 데이터는 Higg Index, 화학물질 정보는 ZDHC Gateway, 시설 정보는 Open Supply Hub, 원료 추적은 텍스타일제네시스(TextileGenesis)와 트러스트레이스(TrusTrace)가 각각 담당한다. 이들 플랫폼 데이터를 API로 연동해 DPP를 자동 생성하는 방식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디다스, 데카드론 등이 이미 트러스트레이스를 통해 1만 개 이상의 자재·수천 곳 공장 데이터를 실시간 처리하고 있다.

Higg BRM과 CSRD 기준 ESER의 부합정도(출처: BRM and CSRD ? Simplifying Your Reporting Journey, Journey, Cascale Annual metting 2024)
한국 기업의 전략: ‘K-DPP’ 구축해 규제를 기회로 전환
가이드라인은 한국 기업을 위한 3단계 도입 로드맵을 제시했다.
1단계(1~2년차, 기반 조성기): EU ESPR 대응 데이터 항목 표준화, 분산형 데이터 스페이스 프로토타입 구축, 업종별(제직·염색·봉제) 데이터 수집 가이드라인 배포. 우선 수출 비중이 높은 대기업과 글로벌 브랜드 납품 벤더가 핵심 대상이다.
2단계(3~4년차, 확산 및 고도화기): 스마트 팩토리 IoT 센서·MES 시스템과 연동해 탄소 배출량 등을 수기 없이 자동 수집. 인센티브 기반 중소기업 참여 확산, 국내 온라인 플랫폼 내 DPP 시범 적용.
3단계(5년차 이후, 생태계 완성기): EU와 데이터 상호인정 협약 체결, 디지털 트윈 기반 온디맨드 생산 체계 보편화, 재활용·수선 시장 활성화.
핵심 전략은 ‘투 트랙’으로 나누어진다. EU 수출 대기업은 즉각 대응, 내수형 중소기업(Tier 3·4)은 인센티브를 통한 단계적 참여 유도다. EU의 일괄 규제 방식을 그대로 한국에 적용하면 오히려 국내 제조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DPP는 규제 비용 아닌 ‘경쟁 자산’
가이드라인은 DPP를 단순 규제 대응 도구가 아닌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로 규정한다.
중고 거래 시장에서 DPP는 디지털 보증서로 기능해 검수 비용을 낮추고 소비자 신뢰를 높인다. 수선 서비스 시장에서는 부자재 정보와 수선 가이드를 기반으로 새로운 ‘애프터 마켓(after market)’이 형성된다. 마케팅 측면에서 QR 스캔 하나로 소비자에게 원산지·탄소 발자국·윤리 생산 정보를 스토리텔링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Made in Korea’가 품질을 보증했다면 DPP 시대에는 ‘검증된 친환경성(Verified Sustainability)’을 보증해야 한다. 이는 저가 수입품과 차별화되는 핵심 포인트다.
한 마디로 한국 섬유패션 산업이 AI 디지털 표준 선도자로 도약할 수 있는 골든타임은 바로 지금이다.
[기사원문] 섬유패션 DPP, 이제 선택 아닌 생존 전략 - 김희정 기자 패션인사이트│2026-03-19